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의 로마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 ===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줄곧 보아온 쪽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당연히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라 부르며, [[프랑크인]]들이 보내온 사자가 '''그리스의 왕''' 따위 운운하지 못하게 했다. 이슬람권 입장에서도 동로마는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부터 지목해 온 '''신학적 차원에서 언젠간 정복해야 할 거대한 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제도적, 과학적 측면에선 또 스승뻘인 문명이기도 했기에 적이었던 동로마의 '로마'로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본인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었다. 즉 '로마 제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웬만한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펼쳐보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이며,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서적에서 이 같은 소리를 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에서 음운 변동을 거친 끝에 '이스탄불'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일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아랍의 기록에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도시로', 또는 '그 도시에' 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이스 틴 폴린(εις την Πόλιν)' 에서 유래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에도 이미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된 것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0년의 일이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 가장 널리 보이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을 [[오스만어]]로 발음한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 이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스탐불', '스탐볼',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인 '이슬람볼' 등이 쓰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인들 스스로가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스탄불 지명을 보면 Constantinople(콩스탕티노플) 혹은 Stambul(스탕뷜)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렸음에도 공식명칭은 한성이었듯이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공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고, 이스탄불은 비공식 애칭 정도일 뿐이었다.[* 다만 수도방위사령관 비슷한 관직을 이스탄불 아아스(İstanbul ağası)라 하고 대한민국의 서울시장 정도 되는 자리를 이스탄불 에펜디시(İstanbul efendisi)라 하는 등 일부 관직명에도 이스탄불이 들어가기는 했다.] 두 번째 근거는, 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따져 보면 사실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2대째 군주인 [[오르한]]은 1346년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과 결혼한 일이 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은 소년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 세력과 원래 섭정이었으나 정적들에게 쫓겨나 황제를 칭한 요안니스 6세(요안니스 칸다쿠지노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요안니스 6세는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오르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로 인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다만 정략결혼 이외에도 오스만군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 곳곳을 약탈하는 것을 묵인하는가 하면, 갈리폴리 반도의 요새 하나를 내어주는 등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르한이 자신의 조상인 만큼 동로마 황녀도 자신의 조상이고. 즉 동로마 제국 황실은 자신의 친척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오르한 이후 즉위한 [[무라트 1세]]는 동로마 황녀가 아닌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기에 실질적으로 피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스만에서는 아시윽파샤자데(Âşıkpaşazâde), 기독교 측에서는 동로마 망명 역사가였던 테오도로스 스판두니스(Θεόδωρος Σπαντουνὴς)를 비롯한 15세기부터 전해 오는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북서쪽 비티니아 지방 일대에서 활동하던 네 명의 베이가 연합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네 명 중 한 명이 바로 지도자 격이자 이후 오스만 황가의 시조가 된 [[오스만 1세|오스만 가지]](Osman gazi)이고, 다른 한 명은 투라한 베이(Turahan bey), 나머지 두 명은 미하일 코세스 베이(Mikhael Kosses bey)와 에브레노스 베이(Evrenos bey)라고 전하는데, 미하일 코세스나 에브레노스 모두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식 이름이다. 건국 전승 자체가 이러할 만큼 오스만 제국은 성립 바로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던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통혼과 개종을 통해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흡수하여 계승 의식을 주장했다. 그 와중에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상당히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심지어 렘노스 섬의 영주들을 필두로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 동로마계 영주들은 '''15세기 말까지도 개종을 안 하면서''' 술탄에게 그 지위와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받으며 버틸 만큼 최대한 마찰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흡수하였다. 오스만 제국 내의 동로마 세력 역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는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번째 설은 [[오스만 1세]]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가 [[콤니노스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 음해를 당해 [[셀주크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메르가 후일에 쉴레이만 샤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오스만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미천한 농민의 후예라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이야기 모두 신빙성은 없지만 첫번째 설은 동로마 귀족 출신들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고, 두번째 설은 동로마 평민 출신의 예니체리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 역시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동로마 제국에서 찾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는 [[https://hanuur.tistory.com/m/22|이곳]]에 소개되어 있다. 이밖에 [[모굴 칸국|모굴한국]]이나 [[히바 칸국|히바 한국]] 등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주로 룸(Ruhm / Rum)으로 칭했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는 오스만을 로마의 연속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https://youtu.be/2uXPf-Wb_jE|이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요약하자면 이미 과거 로마의 왕조들은 다른 이민족 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황실은 또 다른 로마의 이민족 왕조라는 입장이다. 또한 오스만의 파디샤들은 즉위식때 로마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통일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그저 고대 로마가 [[로마 다신교|다신교]]를 믿다가 이후 기독교화된 것처럼 이번에는 이슬람교화 됐다는 것이다. 반면 서유럽인들은 대체로 오스만을 로마 제국의 후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오스만같은 이교도 국가는 기독교 국가인 로마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보았는데, 당장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제국 내 반가톨릭 성향의 중심인물이었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를 임명한 일이었으며 원래 로마 황제가 주는 은십자가까지 손수 장만해서 제공했다. > 또한 [[메흐메트 2세|메흐메드 2세]] 이후의 술탄들이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로 “로마의 카이사르(카이세리 룸)”라는 칭호(당연히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한 말이다)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 그러나 실제 비석 등에는 “카이사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고대 이란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 “[[왕중왕|키스라(Kisrā)]]”와 대구로 쓰일 때가 많았는데, 이를 보았을 때 “카이사르”란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동서 바다의 왕을 겸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나라로 적극 평가하는 문서 역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 당시의 지배층이나 문인에게 오스만 제국이란 [[아바스 왕조]]에서 시작된 무슬림 왕조와 오구즈 칸에게서 시작된 튀르크계 왕조를 계승하는 존재였을 뿐, 거기에 로마 제국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는 칸이나 술탄보다 사용 빈도가 훨씬 더 낮았다. >---- >≪오스만 제국≫ -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그러나 위의 오가사와라의 주장처럼 오스만 제국이 로마 계승성을 표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스만에서 로마에서 유래한 칭호를 과시용으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로마 계승 의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스만 시절에도 오스만의 황제는 임페라토르나 바실레우스를 칭하는 게 아니라 이슬람의 칭호인 술탄과 튀르크 고유의 칭호인 ‘칸’을 칭했었다. 오스만 황실 본인들 입장에서 '로마의 황제'는 '이슬람의 칼리프', '튀르크족의 대칸' 같이 필요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꺼내서 과시할수 있는 여러 타이틀 '중 하나'에 더 가까웠고,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기록은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문화 엘리트에 편입된 구 동로마 유민'''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저런 현상은 오스만 뿐만 아니라 동로마 유민들이 살았던 모든 국가들에게서 나온 현상이다. 당장 오스만 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라틴 제국에서조차 저런 현상이 나타난다. 망국의 생존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새 국가의 군주를 칭송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만과 다른 국가들은 큰 차이가 있다. 첫번째로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동로마 유민들이 선택권이 있었지만 오스만의 경우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스만 치하의 총대주교들만 해도 술탄에게 밉보이면 총대주교로 남을 수 없었고 때문에 술탄과 적극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든 싫든 필수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동로마 황제에게까지 파문을 선언하던 세계총대주교가 술탄에게 칭송하고 충성하기만 했다면 당시의 교회적 관점에서 그것은 그리스 정교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주었을 뿐이다. 사실 오스만 내에서 공식적으로 술탄을 칭송하던 총대주교들조차도 대개 뒤에서는 선을 긋거나 우회적으로 돌려깠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 세계총대주교가 파견한 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 왜 이교도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느냐는 물음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충성하는거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식의 논리였다는 점을 보면 이게 진실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이후 공산화, 독재정권이 들어선 슬라브권, 동유럽권 정교회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를 막론하고 공식 교회가 세속권력에게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 교회들이 자국의 공산당, 독재자를 인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에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될 말이다. 두번째는 오스만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동로마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파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자체도 파괴했고, 로마의 중요한 정체성인 기독교(정교회)에 대해서도 총대주교청을 어용교회로 만들어 지배했다. 그런 오스만을 동로마 유민들이 가톨릭이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보다 정말 진심으로 호의적으로 여겼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 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에도 기독교인 엘리트층이 지속적으로 가톨릭이나 다른 국가의 정교회(주로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오스만 밖으로 이주하면서 그리스인 디아스포라를 만들었고 다른 국가의 동로마 유민들은 하나같이 오스만을 비난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수백 년 전의 일 가지고도 라틴인들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었는데, 오스만의 정복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동로마 유민들은 오스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이것을 오스만의 관점에서만 서술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다. 대부분의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피정복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이익과 위험 앞에서 표면적으로 술탄을 군주로 인정했지만 술탄에게 충성하는 이들도 동로마와 오스만의 국가적 계승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도 메흐메트 2세에게 은십자를 바쳤지만 그 이후에도 우회적으로 무슬림들을 비난했고 오스만에 맞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한 동로마인들을 순교자로 칭송했다. 후술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같은 사건으로 오스만 내의 기독교인들의 지위가 악화되고 술탄의 명으로 고위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처형 위험까지 가는걸 경험한 인물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술탄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 보라, 자비로운 주님께서 어찌 우리 교회의 진실하고도 온전함을 보존하셨는지; 그는 무에서부터 강력한 오스만 가문의 제국을 불러일으켜서 이들이 정교회 신앙에서 멀어져가던 로마인의 제국을 대체하게 하셨으며, 이 새로운 제국을 다른 제국들 위에 올리시며 이 또한 신의 뜻이란걸 천명하셨노라 >---- >≪교부들에게 호소≫, '''18세기 후반'''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테모스 > (피리 레이스 제독의 항해서를 인용하며) 언젠가는 로마 땅에서 일어난 정복자가 마그레브 전체를 지배하며 세우타를 정복하고 수피들의 교당을 번영시킬 날이 오리라... 피리 레이스가 1526년 항해서를 술레이만 대제에게 헌상했을 때 그는 그가 헌정한 주군이 다스리는 땅을 '로마땅 (Diyar-i Rum)'이라 불렀다... (중략) 16세기 오스만 항해사들이 그들의 주군에게 충성을 표할때, 이들은 대부분 술탄을 '로마의 지배자'라고 불렀지, '오스만 가문 (Al-i Osman)'이라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들이 충성을 서약한 대상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주군이 다스리는 땅에 대한 것이었지,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Isom-Verhaaren, C. 2014. "Was there Room in Rum for Corsairs?: Who was an Ottoman in the Naval Forces of the Ottoman Empire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Osmanli Arastirmalari-the Journal of Ottoman Studies (44)≫ > "술탄에게 가까운 지배층(askeri)는 출신 밀레트를 불문하고 일반 신민(reaya)과 정체성 차원에서 구분짓기를 원했으며, 여기서 택한건 '로마인'이란 정체성이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로마인 (Rum)'이란 단어가 가졌던 의미와 중요성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사용하는 정교회 밀레트로서 '로마인'과 무슬림들도 표방한 '로마인'으로서의 차이이다. 전자는 정교회를 믿는 하나의 피지배 집단이었지만, 후자는 오스만 궁정에서 활동하는 관료, 시인, 예술가들이 선호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이었다. 두번째는 제국 내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표방하는 '루멜리아'로서의 중요성이었다.... (중략) 제국의 심장이 뛰는 땅은 루멜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뿐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의미는 제국 자체의 국격과 술탄들의 지위 자체를 높여주는 선언으로서 '로마의 황제 (kayzer-i Rum)'이란 칭호가 가지는 중요성이었다. >---- > ERGUL, F. ASLI. "The Ottoman Identity: Turkish, Muslim or Rum?" Middle Eastern Studies 48, no. 4 (2012) 현대의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키예의 로마 계승성을 부정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단절하고 근대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계승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 수립 및 통합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서를 참고할 것.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은 로마 제국보다도 오스만 제국과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만 공화국 시대에도 문화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계승성을 인정하기도 했고, 튀르키예 관광청 같은 정부기관의 홍보서적이나 학술 서적에서도 이에 대한 담론들을 다루기는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